남겨진 것이 남겨진 것에게 남긴 것.
모든 것은 결국 과거가 된다.
추석이 지나고도 여름이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더니 오늘에서야 찬 바람이 불었습니다. 가을이라고 하기엔 너무 갑작스러운 추위라서 당황했지만 반갑기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반가웠어요. 이번 여름이 정말 길었으니까요. 이러다 정말 여름이란 계절에 묶여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고, 그제야 여기저기 경고하던 기후위기와 환경변화 같은 이야기들이 실감 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구종말을 향해 상상이 이어질 때쯤 가을 장맛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그치고 쌀쌀한 바람에 화들짝 놀라고 나니 오래도록 익숙했던 더위보다는 오늘 집 앞에서 잠깐 맛본 추위가 더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모든 그런 것 같아요. 과거의 것은 결국 지나가고 눈앞에 닥친 것, 실제로 마주한 것이 전부처럼 느껴지는 것. 과거는 그렇게 남김없이 쉽게 사라지는 걸까요? 오늘 추천드릴 영화를 보면서 생각해볼만한 질문입니다.
자극적이지 않은 요즘 보기 드문 영화.
영화 바튼 아카데미는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 넷플릭스 표 영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 영화만큼은 추천해주고 싶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여운이 남지만, 슬픔과 아리송한 끝맺음이 일으키는 공허한 여운이 아니라 마음을 꽉 채우는 따뜻한 여운입니다. 제가 영화를 보며 이런 마음을 느껴본 게 언제인가 싶더라고요. 아무래도 최근에 제작되는 영화들은 변화하는 관람객들의 성향에 맞춰서 빠르고 자극적이고 더 자극적이기 위해 요란한 편입니다. 시끄러운 쇼츠 영상처럼 순식간에 몰입되고 중독되지만 너무 많이 접하다 보면 무엇을 봐도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요. 저처럼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감각세포가 모두 닳아 없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분들이라면 이 영화를 한번 권해보고 싶습니다. 쉽고 편안하고, 물론 눈물을 찔끔 흘리게하는 진부한 감동코드가 어김없이 등장하지만 그 마저 밉게 보이지 않는 영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간략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바튼 아카데미라는 남자 기숙학교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2주간의 연휴가 찾아오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모두 학교에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학생들을 관리하기 위한 담당 선생님도 한명 남게 되죠. 그중 학생 앵거스는 꽤나 반항적인 성격입니다. 앵거스의 관리를 도맡게 된 교사 허먼 역시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인기 없기로 유명합니다. 융통성 없이 원칙만을 고수하는 편이라 F+나 D-같은 점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는 무시무시한 인물입니다. 그런 둘이 2주 동안 크리스마스 연휴를 함께 보내게 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앵거스가 왜 그렇게 반항적인 학생이 되었는지와 허먼 선생님이 왜 정석대로의 가르침을 고수하는지 같은 이유 말이죠. 모두 성장하면서 겪은 개인적인 아픔을 바탕으로 그런 성격과 가치관을 갖게 된 것이죠. 역시 사람의 성격은 개인 고유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하게 나쁜 사람 완벽하게 좋기만 한 사람도 없죠. 이처럼 영화의 끝 부분에서는 이 둘은 서로의 상황과 인생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해하게 됩니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남겨진 것들 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The holdovers 입니다. holdover라는 단어를 해석하면 남겨진 것, 남긴 것, 뒤떨어진 것, 묶인 것 등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화 내용을 대입해 본다면 단순히 크리스마스 연휴에 학교에 남게 된 사람들을 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용을 조금 더 들여다본다면 개인이 겪은 슬픔과 고통에 여전히 남겨진 사람들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메리는 교내식당 조리사인데요, 바튼 아카데미에 다녔던 아들을 전쟁에서 잃고 맙니다. 그 뒤로 메리는 계속해서 슬픔 속에 살고 있죠. 크리스마스도 아들을 떠올리게 하는 슬픈 날일 뿐입니다. 또한 학생 앵거스는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빠집니다. 이혼한 엄마는 새 남편을 만나 아들을 나몰라라 하고 친아빠는 정신질환으로 요양원에 격리된 상황이라 우울증 약을 먹으며 하루를 버텨야 합니다. 게다가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서 아직도 몇 년째 졸업을 하지 못하고 학교에 남아있어야 하는 신세입니다. 마지막으로 허먼은 이 학교를 어릴 적 졸업하고는 다시 돌아와 여태 같은 과목을 가르치며 살고 있습니다. 이 셋은 모두 크리스마스를 함께 할 가족이 없으며, 그로 인해 슬픔과 함께 학교에 남겨진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합니다. 셋은 결국 서로에게 가족과 같은 존재가 되어주며 상처받은 부분을 회복할 수 있는 시작점을 만들어줍니다. 특히 크리스마스를 어쩔 수 없이 겪어내야한다는 태도에서 서로에게 가장 좋은 크리스마스를 선물해 주자는 마음을 갖게 되면서 그 변화가 시작됩니다. 영화 끝부분에 가서는 허먼은 앵거스에게 더 좋은 미래를 남겨주기 위해 부모도 하지 못한 진심 어린 희생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결국 원치 않게 남겨진 사람이 되어 남겨진 삶을 살던 이들이 서로에게 소중한 무엇인가를 남기면서 영화가 끝이 납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놀란 점이 있습니다.
전체적인 톤과 연출이 너무나도 옛스러워서 넷플릭스 최신영화가 맞나? 의아했는데요 알고 보니 2023년도 개봉이 맞았고 모든 것이 1970년대를 배경으로 연출된 것이었습니다. 넷플릭스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메이킹 필름을 보면 감독이 그 시절을 재현해 내느라 잠깐 나오는 스케이팅 장면에 쓰일 스케이트 보드조차 옛날 모델로 준비했다고 합니다. 또 긴 머리를 가진 남자 배우들을 구하느라 바빴다는 말도 하는데요, 실제로 영화에 나온 학생들은 대부분이 턱선까지 내려오는 장발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유행 스타일이었겠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건 음악이었습니다. 실제 그 시절의 음악과 오로지 영화를 위해 제작된 음악이 섞여있지만 모두 적절한 타이밍에 삽입되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분위기를 잘 표현해 낸 것 같습니다. 비주얼 톤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요.
개인적으로 의미있던 장면도 있습니다.
앵거스와 허먼이 박물관으로 현장학습을 나간 장면입니다. 지루하게 유물을 스쳐 지나가며 얼른 다른 곳에 가자고 재촉하는 앵거스에게 허먼이 이리 와서 이것 좀 보라며 접시 하나를 가리킵니다. 그건 아주 오래된 그리스 시기의 유물이었는데요 그 접시에는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익숙한 장면이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앵거스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자 허먼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 사는 건 어느 시대나 똑같아.
다들 삶의 희로애락을 자기 세대의 전유물로 생각하지만
인간의 모든 충동과 욕망은 혐오스러운 것이든 숭고한 것이든 늘 여기 있어. 네 모든 주변에!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가 역사학의 중요성을 주창하는 대사였으나 저는 문장 하나 하나가 위로가 되더라고요. 안 그래도 나만 겪는 고통, 나만 아는 즐거움처럼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들로 벽을 쌓고 살고 있었는데, 그 모든 대단한 고통과 괴로움도 결국은 과거의 누군가, 수천 년 전 그리스에 살던 누군가가 느끼던 감정과 별반 다를 게 없겠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이었죠. 저는 어느 역사를, 어떤 과거를 들여다봐야 오늘의 저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잘은 모르겠으나 작년에 나온 이 영화가 그리는 70년대의 풍경이 작은 실마리를 준 것 같기도 합니다.
얼마 전 일기를 쓰다가 벌써 올해의 260여 일이 지나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말인즉슨 올해가 100일 정도 어쩌면 그보다 적게 남았다는 얘기겠죠. 연말의 한 주 전인 크리스마스는 100일도 채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올해는 가을이 유독 짧을 테니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흰 눈이 두껍게 쌓이는 겨울이 찾아와야지 그제야 지루했던 올해의 무더위를 추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첫 포스팅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감상을 공유하고 싶으시면 편안하게 댓글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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