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말에 다녀온 산

겨울 계방산 첫 일출 산행 후기

by loadedgarlic 2025. 1. 17.

첫 일출 산행 후기

 

지하철 막차를 겨우 타고 사당으로 향했다.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등산용품으로 가득한 배낭을 메고 뒤뚱 뒤뚱거리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산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체력이 고갈되는 느낌이었다. 이미 그날 오후는 미리 챙기지 못한 짐들을 사기 위해 하루종일 백화점과 다이소를 왕복하며 이만보 이상을 걸은 후였다. 지하철만 타면 한 시간가량은 쉴 수 있겠지 생각했다. 그래도 무게에 무릎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은 생생했다. 남들은 건강을 위해 산행을 한다지만, 내가 하는 산행은 항상 건강을 해치는 것 같다.

 

 

밤 12:00

사당역

밤 12시가 넘어 사당에 도착했다. 버스 출발은 새벽 1시 30분.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저녁을 먹기엔 좋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4시간 운영하는 식당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사당역은 여러 호선이 모이는 중간지점이다보니 새벽이 되어서도 운영하는 식당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혼밥을 해야 한다는 점. 버거킹을 마지막 선택지로 놓고 지도를 확대해가며 혼밥식당을 찾았다. 아무리 햄버거가 좋아도 밤 12시 넘어서 햄버거를 먹기엔 부담스러웠다. 콜라와 햄버거가 뱃속에서 둥둥 떠다닐 것 같았다. 그러던 중 감자탕집을 발견했는데, 뼈해장국도 팔고 있었고 네이버 리뷰를 보니 혼밥도 가능한 듯 보였다. 가게 주인은 환영하지 않겠지만 뻔뻔한 얼굴로 입구 근처 2인석에 자리를 잡았다. 

 

해장국집은 대학생들로 가득했다. 토요일 새벽인데도 술에 취해 흥이 올라보였다. 이십대들 할법한 고민들이 들려왔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반복되는 고민들 말이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는 어디서 일을 하고, 나는 뭐가 하고 싶고 그런 고민들 말이다. 나도 그 시간을 분명 지나왔는데 지금 내가 하는 고민들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에 절망적이기도 했다. 그때는 술과 함께 또래 친구와 함께 답도 없는 질문들로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새웠다면 지금은 아무도 없이 혼자 질문을 던지고 시간을 견디는 편이다. 술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당역 10번 출구 근처 '사당24시감자탕' 뼈해장국 9,000원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리뷰에는 일부 부정적인 평가가 있었는데 추운 날씨에 저녁도 굶은 상태에서 뜨끈한 해장국에 밥을 말아먹으니 몸에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1인 식사인데도 담아놓은 반찬을 그냥 내준 것인지 반찬이 너무 많이 남아 곤란했다. 당근도 무도 열심히 씹어먹었으나, 국물도 김치도 여전히 많이 남았다. 배는 아직 공간이 남았는데, 한 공기만 더 시켜 먹을까? 고민했지만 앞으로 못해도 4시간은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고, 4시간은 화장실 없는 산속을 걸어야 하니 자제하는 것이 맞는 듯했다. 그 생각을 하자 입고 있던 등산 바지가 벌써부터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혼밥 하는 사람이 나뿐이 아니었는지 어떤 손님은 결제하고 나가면서 넉살 좋게 '매번 혼밥 해서 죄송하다'라고 말했다. 사장님은 오히려 감사하다며 친절하게 답했다. 나도 나가면서 저런 인사를 건네야 했을까. 그냥 잘 먹었습니다 하고 크게 인사하고 나왔다. 지금 든든하게 먹었으니 버스를 타고 가며 천천히 소화시키면 등산을 하기에 딱 좋은 상태가 될 것이다.

 

버스 탑승까지는 40분 가량이 남았다. 

혹시나 해서 탑승장소 근처를 가보았으나 주차된 버스는 없었다. 산행 단톡방도 아직 조용했다. 날씨가 조금 추웠으나 등산화에 방수 스프레이를 뿌리고 말리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20분이 지났고 단톡방에 미리 도착한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문을 열어주겠다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페어플레이 어플에서 새벽출발 대피소가 오픈될 예정이라고 본 것 같았는데 막상 정보를 찾으려고 블로그에 들어가면 내용이 없었다. 메시지를 보니 지도엔 멸치국숫집이 찍혀있었다.

 

새벽탑승객들이 끼니와 추위를 해결할 수 있도록 멸치국수집을 대여받은 줄로만 알았는데 정작 멸치국숫집은 문이 닫혀있었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나와 비슷한 차림의 등산객들이 건물 통로 반대편에 모여있는 게 보였다. 알고 보니 멸치국숫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그냥 동일한 건물의 2층에 대피소가 마련된 것이었다. 사람들을 따라 올라가니 나름대로 의자와 테이블을 넣어놓은 휴게공간이 보였다. 산행신청을 한 사람은 모두 28명 정도인데, 막상 도착한 사람은 10명도 되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함께 산행을 해본 지인들인지 서로 격의 없게 인사하며 함께 몰려다녔다. 나처럼 혼자온 등산객도 있었는데, 또래 같아서 말을 한번 걸어볼까 생각하다가 나만큼이나 소심한 성격 같아서 그만두었다. 등산을 함께할 지인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를 새롭게 알아가는 일이 번거롭다. 특히 나의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시기에 말이다.

 

 

새벽 1:30

버스

 

탑승시각 5분전에 일어나서 버스로 향했다. 아래에 등산스틱과 신발가방을 싣고 큰 배낭은 자리 위 선반에 올려두었다. 버스 창문은 모두 커튼으로 가려져있었고 출발하자 곧 차 안의 불이 꺼졌다. 빨간 조명만 남긴 채로 본격적인 취침모드가 되었다. 이제 전날의 고통과 긴장, 불안 같은 것은  모두 날려버리고 잠에 들어야지 생각했다. 등산이 가고 싶었으나 예상치 못한 기온과(영하 20도의 날씨) 그에 걸맞게 준비하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으로 등산을 취소해버리고 싶었다. 작년만 해도 이런 감정 때문에 많은 돈과 기회를 날렸다. 원서를 접수하고, 시험을 예약하는 등 부지런히 결제를 해놓고서 막상 당일이 되면 그 바로 전날부터 급격하게 스트레스를 받다가 잠을 못 자고 다음날 일정을 눈을 꾹 감고 모른척하기 일쑤였다. 정말 중요한 면접도 많이 놓쳤다. 나도 나의 이런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으나 모두 내가 선택한 행동이다. 

 

등산의 경우에도 이미 주중에 취소하려고 했으나 3일전부터는 환불이 불가하다는 조항이 있었다. 사실 당일을 제외하고 일자에 따라 10프로, 20프로 환불을 해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것 역시 환불이 되지 않을까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다 이미 사놓은 등산용 장비를 보고 있으니 버스라도 타는 게 맞겠단 생각이 들었다. 돈이 너무 아까우니 버스라도 타고, 산 입구라도 들어가고, 올라가다 힘들면 굴러서라도 내려오자. 어차피 올라가는데 2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 짧은 코스라고 하니, 1시간 정도 오르다가 굴러서 내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달래고 합리화를 하며 버스에 탔고, 이제 모든 선택지가 사라지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버스에서는 웰컴키트를 나누어주었는데, 물티슈와 온열 안대, 가글액, 홍삼액이 들어있었다. 페어플레이라는 플랫폼은 이런식으로 브랜드의 협찬을 받아서 운영되는 듯싶었다. 일차적으로는 개인이 지불한 참가비에서 버스대절비를 제외하고 수익으로 사용할 것이고, 광고협찬 형태로 브랜드와 협업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새로 들어온 홍삼액의 사진을 잘 찍어달라며 여러 번 부탁했다. 혹시 필요할지도 몰라 사진을 여러 번 찍은 뒤 온열 안대를 차고 잠을 자려했다.

 

 

01

 

그러나 잠을 자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왜냐면 조용한 버스 안에서 코골이 합주가 시작되었기 때문. 단체 생활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고통이다. 나처럼 잠에 빨리 들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정말 고통의 시간이다. 우렁찬 코골이는 아니었으나 내 근처에서 고롱고롱거리며 두 명이 코를 골았기 때문에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었다. 에어팟을 꺼내 얼른 귀를 틀어막았으나, 주변소음 차단기능을 써도 코골이 소리를 지우진 못했다. 그렇게 피곤한 채로 눈을 감고 정신은 뜬 상태를 유지하며 휴게소에 도착했다.

 

 

새벽 4:00 

평창 휴게소

잠도 자지 못하고 휴게소까지. 너무 피곤했으나 그래도 화장실을 들리기 위해 일어났다. 운두령에도 화장실이 있다고는 하는데 간이 화장실로 아주 더럽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 다행히 평창휴게소의 화장실은 나름 최신식으로 깨끗했다. 새벽이라 열려있는 매점은 없었다. 

 

 

새벽 5:00

운두령 주차장

예상했던 것 보다 빠른 시각에 산 입구에 도착했다. 미리 올라가 산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 춥기 때문에 출발시각을 5시 20분경으로 조정하기로 했다. 일출은 7시 40분에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넉넉하게 2시간 산행을 하더라도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등산 속도가 느린 나는 2시간으로 부족할 것 같았지만 혼자서 초행길의 설산을 오를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다 같이 출발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아이젠을 착용하고, 바람막이를 입고 사람들을 따라 올랐다. 나는 등산스틱을 들고 올랐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균형의 달인인지 맨손으로도 무리 없이 걸어 올라갔다. 

 

산은 아주 어두웠다. 해드램프의 각도를 여러번 매 만지고 나서야 걷기에 편한 위치를 찾았다. 그 이후로는 거의 바닥만 보면서 부지런히 걷기만 했다. 나는 나름대로의 속도로 오르고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의욕적인 속도로 걸었다. 아직 시작지점인데도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열심히 따라 올라가기엔 벌써부터 몸에 열이 나면서 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 멈춰 서서 숨을 하나 둘 고르고 저 앞에 불빛의 행렬이 가는 걸 바라보며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 거리만큼은 꼭 유지하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고요한 상태로 혼자 걷다 보니 그제야 산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걷기 좋게 다져진 눈길부터 시작해서 그 좌우에 쌓여있는 포근한 눈, 산을 둘러싸고 있는 겨울나무 가지들과 그 사이로 보이는 빨간 달까지. 보름달이 뜨기 전후였는지 달이 아주 동그란 모양이었다. 노랗지도 않고 빨간 달이라 멋지기도 아주 멋졌다. 약간의 감탄을 하면서 내가 생각만 하던 설산 일출산행을 정말 하고 있구나, 깨달았다. 어떤 계획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일어나지 않고 사라지고 어떤 계획들은 준비가 덜 되어도 결국 일어나고. 그 차이가 뭘까.

 

그렇게 혼자의 생각에 빠져 걷는데 저 멀리서 긴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산행을 이끌던 대장님이 나를 찾아 내려온 것이다. 나는 괜찮다며 천천히 오르겠다고 몇차례 말했으나, 아마 인솔자의 입장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것 같았다. 새벽설산에서 일어날 안전사고는 대낮의 가을산행 안전사고보다 더욱 예휴가 좋지 않을 테니 말이다. 거기까지 내려와 준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사람을 책임지는 일의 번거로움과 스트레스가 떠올라 군말 없이 속도를 높여 얼른 따라 올라갔다. 다행히 금방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힘들지도 않나 궁금했는데 나중에 모든 산행이 끝나고 나서야 그룹채팅방을 확인해 보니, 어떤 사람이 너무 힘들다고 속도를 조금만 줄여주면 안 되냐고 메시지를 남겨놓기도 했다. 그런 걸 보면 나는 조율하고 그룹에게 의견을 전하기보다는, 빠르게 포기하고 혼자 행동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온 것 같다. 민폐를 끼치기 싫어서가 큰 이유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단체 산행이 나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고 또 한 번 느꼈다. 

 

평지에서 3키로는 뛰어서 30분이면 충분한데, 산에서는

 

 

그리고 계속해서 침묵속의 산행이 이어졌다. 다행히 아이젠의 효과가 제대로여서 눈길에 미끄러질 일은 없었다. 아이젠은 확실하게 언 눈 속에 자리를 잡았다. 운동화를 신고 평지를 걷는 것보다 더 단단한 마찰력이었다. 그런데 산의 경사는 어쩔 수 없었다. 미리 찾아본 산행후기에서는 정산 직전에 가파른 오르막이 있고, 그걸 제외하면 완만한 편이라고 했는데 이상했다. 가파른 경사가 한번, 두 번, 못해도 세 번은 나타났다. 이게 그 가파른 구간이 아니라면 도대체 정상 직전엔 어떤 길이 날 기다리고 있는 걸까? 두려움을 느끼며 꾸역꾸역 걸어 나갔다. 나는 여전히 그룹에서 맨 꼴등이었고, 중간중간 내 뒤에 남겨진 사람들이 생겼지만 나는 뒤따라 잡히기도 싫고, 내가 길목에 방해가 되진 않을까 싶서 그 사람들을 앞으로 먼저 보내주었다. 그렇게 마지막 주자를 자처하며 열심히 오르다 보니 산이 밝아왔다. 땅만 보고 걸었는데 저 멀리서 빛이 들었고 건너편 산맥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해드랜턴을 꺼봤는데 모든 게 잘 보였다. 어둑어둑하지만 사물의 분간이 가능해진 순간부터는 그 미묘한 새벽의 어둠을 즐기며 걸었다. 얼마나 남았는진 모르겠으나 어쩌면 해 뜨는 걸 놓칠 수 있겠단 생각도 했다.

 

 

오전 7:40

정상

예상 일출시각에 딱 맞춰 도착했다. 그러나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해는 보이지 않고 이미 밝은 아침의 하늘만 보였다. 정상에 도착하기 10분 전부터는 일출을 놓치지 않으려고 거의 뛰다시피 산을 올랐다. 정상이 눈에 보이는 거리쯤 되자 이미 정상에서의 일출을 즐긴 듯한 등산객 무리가 하산을 시작하기도했다. 나는 이미 해가 떴나요? 물어볼 새도 없이 헐레벌떡 뛰어올라갔다. 제발 아직 다 뜬 게 아니었으면!

 

그저 그림같은 산맥의 음영. 민화 속 까치랑 호랑이가 나올 것 같은 풍경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는 보이질 않았다. 해는 구름에 가려져있었다. 구름이 많은 산이라고는 들었으나 오늘만큼은 깨끗한 일출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가로로 길게 줄지어진 구름 사이로 빨간 해의 끄트머리가 잠깐 보였다. 사람들은 이미 일출을 포기한 듯 보였다. 여기저기 사진 스팟을 찾아서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나 역시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다 내려가버리기 전에 사진 찍을 수 있는 곳으로 몸을 옮겨 사람들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정상석에서, 계단에서, 해를 등지고. 인스타에서 봤던 포토스팟에서 빠르게 사진을 찍고, 다른 사람의 사진도 찍어주었다. 배터리가 다 닳아버린 안타까운 사람도 있어서 내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추위에 핸드폰 배터리가 쉽게 방전된다고 들었는데 다행히도 내 미니폰은 잘 버텨주었다. 잠깐 시계 볼 때를 제외하고는 옷에서 꺼내지 않았고 항상 핫팩에서 멀지 않게 보관했다. 남의 사진을 성심성의껏 찍어주는 사람들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한 방향으로 걸을 때는 얼굴도 보이지 않아서 다들 비장하게만 느껴졌는데 훨씬 순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생글생글한 웃음으로 아주 어려 보이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친구랑 함께 와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모습에 내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오전 8:10

하산

춥기도하도 하산시간을 못 맞추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 빠르게 움직였다. 정상에서 재정비하던 중에 바보같이 양말을 갈아 신었는데, 겉양말을 벗는 순간 발가락이 땅땅한 돌처럼 얼어붙었다. 깜짝 놀라 신발에 넣었으나, 양발의 균형을(?)을 위해 반대쪽 발도 새 양말로 갈아 신었다. 그 짧은 순간에 발이 언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발가락을 열심히 꼼지락대면서 하산을 시작했다. 세상이 밝으니 새벽 산에서 느껴지던 신비로움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등산에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모두 사라졌고, 기분도 좋아졌다. 가뿐한 마음.

 

그러나 가뿐한 건 마음뿐이었다. 몸은 정직하게 축나기 시작했다. 해가 떠서 추위는 덜했으나, 안일한 마음으로 자꾸 땀을 식히고 장갑과 모자를 자주 벗기도 했다. 경치감상은 접어두고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데 갑자기 너무 배가 고팠다. 가져온 물 두병도 이미 다 마신 상황. 챙겨 온 사탕으로 입가심하며 배고픔을 달랬지만, 이상하리만치 허기짐이 느껴졌다. 분명 출발 전에 거하게 먹었는데? 잘 생각해보니 마지막 식사는 밤 12시였고, 이미 8시간이 지난 후. 게다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도 한몫했다. 거기다가 그냥 가만히 깨어있는 것도 아니고 산을 오르는데 2시간의 에너지를 썼으니 몸의 입장에서 보기엔 엄청난 체력고갈인 것이다. 이번 산행에 딱 하나 부족하게 챙긴 것이 있다면 바로 비상식량이다. 가방이 이미 너무 무거워진 탓에 먹을 것, 마실 것을 최소한으로 줄여야겠다고 생각했고, 겨울 산에서는 추위 때문에 무언가를 먹으려고 멈춰있을 시간도 없다고 들어서 간단한 캔디만 챙긴 것이다. 2시간 산행이라고 너무 얕본 것이다.

 

중간에는 너무 힘이들어 벤치에서 쉬었는데, 옆에 있던 다른 등산객들이 일행에게 '초코파이 먹을래?'하고 묻는 걸 듣고 내가 '네 제발요'하고 대답할 뻔했다. 그 사람들이 하산길이었다면 뻔뻔하게 먹을 것을 구걸할 수 있었을 텐데, 갈길이 너무 많이 남은 사람들에게 하산하는 내가 먹을 걸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벤치 주위로 주황색의 작은 새가 짹짹 거리며 날아다녔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걸 보니 이런 식으로 등산객들에게 얻어먹은 경력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내가 새처럼 귀여웠으면 초코파이 달라고 말해봤을 텐데.

 

 

정신을 잘 가다듬고 얼른 하산만 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온두령 주차장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히 요기할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하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처럼 엄청난 인파 행렬이 오전 등산을 시작한 것이다. 틈없이 줄지어 수십명씩 오르는데, 길은 딱 하나여서 혼자인 내가 옆으로 길을 터 기다려주다 보면 금방 몇 분이 지났다.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안전을 위해서 길을 터주었는데 갈수록 등산객이 많아지고 나를 위해 길을 멈춰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짜증이 났다. 기본적으로 하산하는 등산객이 우선인데 말이다. 사람이 내려가야 올라올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리고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지나가면 될 일을 듣기 싫은 소리를 얹어서 기분이 언짢아졌다. 예를 들면, '우리 덕분에 이렇게 쉬엄쉬엄 내려갈 수 있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지금 차가 밀리는 시간이니 급할 것도 없으니 천천히 내려가라.' 등등. 그러나 나는 정해진 버스 탑승 시각에 맞추지 못할까 봐 이미 똥줄이 무척 타는 상황이었다. 그런 식으로 못해도 300명 가까이를 보내주고 나서는 길이 아닌 곳으로 등산스틱을 찍어가며 내려가기도 했다. 그제야 발목이 낮은 등산화 사이로 눈이 들어왔다. 아이젠을 꼈는데도 이리저리 휘청이며 미끄러졌다. 어떤 곳은 눈 속이 푹 파여있어서 넘어질 뻔하기도. 그런 위험을 겪고 나서야 얼굴에 철판을 깔고 거슬러 올라오는 등산객 사이로 몸을 비집고 오르기 시작했다. '좀 기다렸다 가지 뭐 급하다고' 같은 소리를 몇 번 듣고 나자 스트레스가 쌓였다. 산에 오면 대자연 속에서 평화를 찾을 것 같지만, 결국엔 인파 속에서 내 자리 찾기에 가깝다. 

 

그리고 계방산의 고약한 점은 하산길이 하산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리막이 아니라 오르막이 더 많은 하산길이라 심리적으로 체력적으로 무척 괴로웠다. 등산을 시작할때는 어둠 속에서 발등만 보고 걷느라 내리막 길을 걷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세상이 다 밝은 후에 눈앞에 올라야 할 언덕이 보이자 정말 힘이 쭉 빠졌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혼자 한숨을 푹푹 쉬면서 마지막 등산을 이어갔다. 버스에 늦진 않았는지 도대체 얼마나 남았는지. 올라오는 등산객들에게 주차장까지 얼마나 남았냐고 묻고 싶었던 게 여러 번이었는데, 충격적인 답을 들을까 봐 참았다. 참다 참다 못 참고 쓰러질 것 같아서 물어봤을 때 딱 5분 남았다고 희망적인 답이 들려왔다. 정말 몇 걸음만 더 가니 속세의 모습이 보였다. 아스팔트 바닥과 계단과 버스. 감격하며 산을 나왔고 버스 출발까지도 사십 분가량 남아서 충분히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10:30

운두령 주차장

버스에 올라서 따뜻한 히터에 몸을 녹이면 좋으련만, 버스는 기사 아저씨의 근무시간 보장을 위해 11시에 문을 연다고했다. 다행히도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카페 겸 식당 겸 특산물 판매소가 있어서 얼른 들어가 커피부터 한잔 시켰다. 원래는 집에 가서 거한 저녁을 먹을 예정이었는데, 산에서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감자전을 하나 시켜 먹었다.

 

살기위해 전투적으로 먹었던 커피(3,000원)와 감자전(7,000원)

 

옷을 벗고 장비를 다 내려놓고 나서야 정신이 들면서 하산길이 정말 위험했었구나 깨달았다. 고갈된 체력 때문에 머리가 헤롱헤롱했는데 산행이 1시간만 더 이어졌어도 쓰러졌을 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그래서 혼자 하는 산행은 항상 위험한 것 같다. 두 번 다시 설산을 그것도 일출산행을 오를 일은 없을 것이다 확신하며 마음을 쓸어내렸다. 에너지 보충을 위해 감자전을 입안에 쑤셔 넣는데도 머리가 웅웅 울렸다. 꼭 잠도 안 자고 커피 세 잔을 때려 넣어서 정신을 깨어있지만 멍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가방을 정리하면서 내가 하산 시 제정신이 아니었구나 다시 한번 느낀 게, 배가 너무 고파서 꺼내 먹으려고 했던 에너지 젤이 알고 보니 가글액이었다는 것. 너무나 다행히도 날씨가 추워서 가방 앞에 보관한 가글액이 얼어서, 안 먹은 게 다행이었다. 좋지 않은 몸에 가글액까지 삼켰다면 더 만신창이이지 않았을까? 웰컴키트에 들어있던 게 에너지 젤이라고 확신했는데 생각해보니 버스 출발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게 이렇게 위험하다. 

 

 

 

그렇게 나의 첫 눈꽃일출산행은 끝이 났다. 완등의 뿌듯함을 느끼는데도 체력이 필요하단 걸 처음 알았다. 다 끝나고 나서도 너무 피곤해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낭만적일 줄 알았던 하얀 설산은 춥고 위험했고, 남들이 인터넷에 올려놓은 사진이 실물보다 예뻤다. 새해맞이 일출은 올해 중요한 의식 중 하나였는데, 1월 1일에 일출산행을 놓치고 나서 두고두고 아쉬웠다. 하지만 직접 일출산행을 겪어보니, 일출은 잠을 푹 자고 새벽에 비몽사몽 일어나 잠깐의 추위를 견디며 보는 게 최고인 것 같다. 그래도 좋은 점을 찾자면, 해보지 않은 것을 열망하고 부러워하느라 시간과 감정을 더 이상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미 해본 것이 되었으니 말이다. 끝